빌헬름 프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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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빌헬름 프리크는 변호사 출신의 나치당 소속 독일 정치인으로, 1933년부터 1943년까지 히틀러 내각의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2. 초기 행적[편집]
1896년에 뮌헨대학교 고전문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었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1903년에 뮌헨 경찰청 소속 변호사로 취직하여 경찰로서 초기 경력을 쌓았다.
3. 나치당원 시절[편집]
1923년 뮌헨 폭동 때는 나치 측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1년 3개월 징역형과 관직 박탈을 선고받았다.출옥 후 보험 회사에서 법률 자문으로 일하면서 1925년 나치당에 입당했고, 1933년에는 당의 집권과 함께 내무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 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나치 독재의 합법적인 틀을 마련한 수권법의 입안을 주도하면서 나치의 법률 전문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어 뉘른베르크법 등 유대인 탄압을 위한 법안과 독일 재무장의 합리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병합에 따른 관련 법규의 제정 등에 관여했다. 사법권 외에 경찰권도 얻기 위해 당내 다른 지도자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으나, 하인리히 힘러가 독일 경찰청장에 임명되면서 영향력이 급속도로 감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에 힘러가 내무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실각했고, 이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으로 재직하며 점령지에서 강권 정치를 펼쳤다.
4.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과 처형[편집]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 탄압과 홀로코스트를 위한 법 제정과 실행에 관여했다는 죄목이 인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그의 유언은 "불멸의 독일이여 영원하리!"였다.
5. 여담[편집]
교수형 과정에서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처럼 머리를 부딪쳐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며 질식사로 죽었다. 이는 소련의 요구가 반영되었는데 독일로 인해 나라가 5년동안이나 박살이 나고 자국의 인명이 1000만이 부상당하고 2000만 명이 넘는 희생을 당한 소련 측에서 전사형수를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오랫동안 매달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사형시키라고 강하게 요구해 이를 받아들여 집행자 측에서 소련의 요구 대로 줄길이를 조절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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